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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일기

3/31 소년의 시간

나비사슴 2025. 4. 2. 06:00

⚠️ 전체 회차의 줄거리가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피하고 싶은 분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범죄 드라마지만 긴박감이 느껴지진 않는다. 인셀과 관련된 내용이다. 13살 꼬맹이가 연기를 잘한다. 원테이크로 촬영했다. 이 정도 정보만 가지고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총 4회로 짧긴 하지만, 정말 순식간에 보고 말았다. 원테이크 촬영이라 빠른 컷 편집이나, 시간의 순서를 뒤섞는 트릭을 쓰는 것도 아닌데, 이야기 자체가 가진 힘으로 우직하게 밀어붙여 재미를 주는 드라마였다.

4회는 각각 사건 발생 후 1일 뒤, 3일 뒤, 7개월 뒤, 13개월 뒤를 다룬다.

1화에서는 용의자를 체포하기 위해 경찰들이 집을 급습한다. 가족들은 어리둥절하는데, 아들의 혐의는 살인이란다. 경찰이 집에 문을 부수고 들어왔지만 체포 후에는 철저한 시스템 안에서 용의자를 대한다. 미성년인 살인용의자는 보호자를 동석할 수 있고, 법정에서는 불리하긴 하겠지만 No comment로 발언을 거부할 수 있다. 발언을 거부해도 경찰은 그게 네 할일이지, 라고 말하며 차분히 심문을 이어나간다. 용의자에게 피해자에 대해 물어봐도 서로 잘 모르는 관계처럼 보인다. 용의자는 너무 어려 보이고 아버지에게 응석이나 부릴 것처럼 보여 무고한 것 아닌가 생각할 때 즈음, 경찰이 결정적 증거를 들이민다. 용의자는 울기 시작한다. 분명 피해자에 대한 미안함은 아니다. 무너지는 아버지와 아들을 놔두고 경찰은 자리를 뜬다.

2화는 3일 뒤, 용의자, 아니 가해자의 학교다. 경찰 페어는 살인 무기인 칼을 찾고자 학교에 도움을 청하러 간다. 우연찮게 경찰의 아들도 이 학교에 다니고 있다. 학교는 따돌림이 일상이다.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르기에 잔인한 구석이 있다. 아이들은 누군가가 죽은 사건이 두렵고 불안하긴 하지만, 내 일이 아니기에 가십처럼 느껴진다. 피해자를 기억하고 애도하는 친구는 드물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경찰들은 그런 학생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다. 헛다리 짚는 경찰에게, 괴롭힘을 당한 경험이 있는 아들이 힌트를 준다. 예를 들어 하트는 색깔마다 다 의미가 다르다,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기 위해 아이들은 자기들만의 언어를 이용한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이해하기 어렵고, 따라가기 바쁘다. 선생님도 아이들을 지도하기엔 역부족이다. 좋은 어른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3화는 7개월 뒤, 구치소가 아닌 훈련소다. 심리상담사는 이번이 다섯 번째 상담이다. 가해자가 좋아하는 핫초코에 마시멜로우를 잔뜩 넣는다. 직접 샌드위치도 쌌다. 그가 어떤 짓을 했더라도 유대감을 쌓아가려는 노력이다.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끌어가며 남성적인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하는데, 자신을 속일 생각하지 말라는 가시 돋친 말을 듣는다. 겨우 13세인데도 상담사보다 위에 있는 것처럼 군다.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이 있는 상담사는 그를 아무렇지 않게 대하려 한다. 하지만 곧 원치 않는 이야기를 끌어내려고 하자 가해자는 폭력적인 행동을 하고, 상담사는 잠시 방에서 나와 마음을 다잡는다. 다시 돌아와서는 더 가까이 앉는다. 가해자는 자신이 주도권을 가지려 상담사를 흔드는 시도를 하지만, 점차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고백하게 된다. 상담사는 상담 종료를 선언하고, 가해자는 너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느냐고 난동을 피우며 끌려나간다. 상담사는 분노일지, 혐오일지, 두려움일지 아니면 그 모든 감정이 섞인 것일지도 모를 눈물을 한 방울 흘린다. 상담사는 가해자가 상담 중 한 입 베어 문 샌드위치마저도 치우지 못하고 나간다.

4화는 13개월 뒤 가해자 가족의 집이다. 공교롭게도 오늘은 아버지의 생일이다. 가해자 가족에게도 행복한 날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아침부터 차에 강간범이라는 스프레이 낙서가 있어 기분이 상한다. 가해자는 살인을 했는데, 누구를 향한 낙서인지 도대체가 알 수 없다. 지워지지 않는 낙서에 아버지는 분노를 가라앉히기 힘들어하며, 가족들을 채근해 당장 철물점으로 간다. 차를 타고 가면서 딸을 사이에 두고 부부는 처음 만났을 때의 추억을 신나게 늘어놓으며 기분을 끌어올린다. 아버지는 철물점에서 스프레이를 지울 수 있는 방법을 물어보다가, 그의 얼굴을 알아보는 직원을 만난다. 그는 가해자가 무고하다는 것을 믿는다며 아버지를 응원한다 말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멍해진 아버지는 페인트를 사서 빠르게 가게를 나온다. 그 와중에 차에 낙서했던 범인들을 발견해 분노를 표출하고, 거칠게 페인트를 차에 뿌린다. 그는 도저히 화를 억누르지 못한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가해자로부터 생일 축하한다는 전화를 받는다. 그리고 눈치 없게도 주장을 바꾸겠다는 말을 하는데, 그는 아무 답도 하지 못한다. 그는 가족 중 유일하게 CCTV로 아들의 범죄를 목격한 사람이다. 그는 여전히 반성이 없는 아들에 대한 분노일지, 그런 아들을 키운 자신에 대한 분노일지, 피해자에 대한 죄책감일지, 그렇게 아들을 방조한 것에 대한 미안함일지, 아니면 그런 아들을 둔 자신에 대한 연민일지 모르는 눈물을 쏟아낸다.

누가 범인인지를 밝히는 이야기가 아니다. 범인이 어떤 사람이고, 이 범인은 길러낸 환경이 어떠한지에 대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이야기다. 범죄를 둘러싼 시스템, 인간 심리, 가족의 균열을 깊이있게 파고든다. 원테이크로 찍었다고 현장을 있는 그대로 다 보여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리얼타임으로 경험할 수 있다. 에피소드마다의 단절만이 시간을 뛰어넘을 수 있다.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했다.

연출 방식의 놀라움만큼이나, 연기에 놀라게 되는 작품이었다. 특히 13세의 살인자와 여린 듯 강단 있는 심리상담사와의 1:1을 다룬 3회는,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옆에서 치근덕거리는 훈련소 감시원과, 그런 접근을 익숙한 듯 단호히 거절하는 모습까지가 스토리를 완성시키는 요소였다. 상담사 역의 에린 도허티의 다른 작품이 궁금해졌다. 영국에서는 드라마에 어떤 상을 주더라. 어떤 상을 타든 지 탈 것이다. 각본, 연출, 연기, 뭐 하나 빠지지 않을 정도로 완성도 높은, 매우 만족스러운 드라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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