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종종 단호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다. 예전엔 내가 그런 속성을 가졌는지 몰랐는데, 언젠가부터는 단호함을 내 것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의 무엇이 남들과 다른 단호함으로 발휘되는지 구체적으로는 알지 못했다. 그저 말투가 단호한 것일까 생각도 했었는데, 친구들에게 들어보면 단순히 표현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다 ChatGPT와 대화를 나누며 내가 말을 흐리거나, 돌려 말하기보다는, 상황을 명확하게 정리하고 말의 의도가 잘 드러나도록 말하기를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실 내가 그렇게 말하는 건 반대로, 애매한 상황에 놓이는 것을 싫어하고, 소통의 오류가 있는 것을 불편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어떻게든 상황을 정리하는 쪽을 택한다.그런데 C언니는 ..
이스탄불에 사는 H가 한국에 왔다. 갑작스러운 약속이었지만, 다행히 시간이 맞아 놓치지 않고 만날 수 있었다. 언제 마지막으로 만났는지 찾아보니, 4년 전이었다. 그때 어디서 만났던 것인지 기억을 하지 못했는데, 식당을 고르다 보니 그때와 비슷한 메뉴가 있는 곳을 발견했고, 딤섬과 면을 먹었던 기억이 났다. 뚝섬 근처의 회사에 다니던 때라 그 근처에서 맛있다는 곳을 찾아갔었다.H는 오랜만에 만났지만, 얼마 전에 이메일을 주고받아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한결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4년의 세월은 생각보다 길지 않았기 때문인지, 마치 어제 본 사람처럼 자연스럽고 편했다. 이야기 주제에 나이와 노화에 대한 걱정이 추가된 게 유일한 변화였을까. 우리는 같은 포인트에서 신나게..

꽃이 한창이다. 기억 속 봄은 개나리가 봄을 불러오고 목련이 바지런하게 움직이고 지기 시작할 즈음 벚꽃이 피곤했는데. 점심 먹고 산책하니 모든 꽃이 한꺼번에 피어 있었다. 올해가 유난히 오래 추운 모양이다 싶어, 동료와 기후 걱정 토크를 나눴다. 그래도 여러 꽃을 한 번에 볼 수 있다는 건 좋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산책을 하며 꽃 사진을 찍었다. 아이폰16E를 사면서 카메라 렌즈가 1개라고 비추하는 사람들이 많아 조금은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괜찮다. 소리도 막귀는 이어폰이 좋거나 나쁜 걸 잘 모르는데, 사진도 내게는 그런가 보다. 남긴 사진들이 꽤 만족스럽다. 요새는 여기저기 피어난 벚꽃 사진이 많이 남았다. 이 정도면 국화로 지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벚꽃이 너무 많다. 한때일 뿐이니 눈을 즐겁..

아침엔 비 예보가 없었는데, 퇴근할 무렵 비가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감독님은 비 맞으며 뛸 사람만 오라고 하셨다. 오늘은 날이 좀 풀려 반팔에 반바지를 들고 왔다. 물론 만약을 대비해 바람막이를 하나 챙겨 왔는데, 가만히 걸으면 손이 시린 이 날씨에 비를 맞아가며 뛰는 게 맞을까 하는 생각을 하긴 했다. 하지만 이번 주엔 오늘 아니면 뛸 수 있는 날이 없었기에 그냥 뛰어보기로 했다.신촌역에 도착하니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고 있었다. 생각보다 날씨가 춥지 않았고, 이 정도 비면 맞아도 괜찮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운동장에 거의 도착했을 쯤엔 가랑비가 되었고,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에 도착하자 갑자기 소나기처럼 비가 쏟아졌다. 축구를 하고 있거나, 트랙을 뛰는 사람들은 할 수 없이 비를 맞으며 하던 것을 계..

가톨릭 종교 지도자가 어떻게 선출되는지를 자세히 알려주는 다큐멘터리같기도 하고, 표를 얻기 위해 암투를 벌이는 정치극 같기도 하고, 사건의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증거를 찾는 탐정 영화 같기도 한, 복잡하면서도 아름다운 영화였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빨강과 흰색의 조화, 펜의 사각거림과 숨소리, 강조되는 손의 힘줄 같은 디테일로 감정을 표현하는 아주 세련된 영화이기도 했다.누가 누구인지 친절하게 자기소개를 하는 영화도 아니거니와, 초반에 살짝 졸아 흐름을 놓친 때도 있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인물들의 이름을 익히게 하고, 이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길을 잃지 않도록 시간순으로 이야기를 진행해 후반에는 매우 몰입해서 볼 수 있었다. 만약 OTT에서 다시 볼 수 있다면, 초반부터 집중해서 한 번 더 보고 ..

⚠️ 스포일러를 피하고 싶은 분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오랫동안 구독해 온 웨이브를 떠나보내는 마지막 날, 스즈메의 문단속을 봤다.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은 2007년 극장에서 초속 5센티미터를 처음 봤고, 너의 이름은은 2016년에 덕후들과 같이 GV도 볼 정도로 관심이 많았다. 이전엔 고퀄리티의 애니메이션을 혼자 작업한다는 데 주목했는데, 최근엔 재난 3부작이라 불리는 큰 스케일의 영화로 높이 평가 받고 있다.애니메이션의 화려함이나 만듦새는 나쁘지 않았지만, 이번엔 그마저도 아쉬웠다. 사실 신카이 마코토는 예전부터 스토리텔링이 약점이라는 평가가 있어왔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에서의 독창성은 있어왔는데, 이번엔 유난히 다른 애니메이션의 짜깁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이 흐르는 어떤 장면은 카우보이 비밥..

4월에 출국하는 P님과 올해 마지막으로 떠나는 도이프의 강릉 여행. 벚꽃을 보기 위해 오늘쯤으로 날을 잡았다. 야속하게도 토요일엔 비가 오고, 아직 추워서 꽃이 아주 활짝 피지 않았다. 이제까지 여행 중에 가장 날씨가 좋지 않아 아쉬움이 많았지만, 힐링을 빙자한 알찬 스케줄 덕에 여고생 웃음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좋았던 순간들- 캐스퍼의 어디든 갈 수 있고 주차하기 편한 작은 차체를 칭찬하다가도, 괜한 자격지심에 무시하는 순간들을 포착해 티격태격할 때- 온 동네 개들 경고를 들으며 좁은 골목 사이를 헤쳐 편의점에서 얼음을 사 온 첫날밤- 필름이 끊겨 기억이 나지 않는, 샤인머스켓, 천혜향, 회와 함께한 수다의 밤- 바다 위를 자전거를 타고 가는 아라나비 체험, 생각 없이 치마 입고 간 우리들- 워들을 ..
약속이 이틀 연달아 취소되었다. 비가 와서 달리기 모임이 취소되고, 상대방이 정기적 모임날을 깜박해 취소됐다. 수요 달리기는 2주째 가지 못하는 거라 좀 시무룩했는데, 목요일은 좀 쉬고 싶어 잘 됐다 싶었다. 약속 취소를 조금 더 빨리 알았더라면 영화를 보러 갔을텐데, 뒤늦게 알아 민첩하게 움직이지 못했다.대신 수요일엔 물건을 전달할 겸 친구를 만나자고 했다가 전에 가려다 못간 양장피 맛집에 갔다. 한 사람을 더 불러 셋이서 탕수육도 시켰는데, 너무 맛있어서 다들 젓가락을 손에서 놓을 줄 몰랐다. 고기를 즐겨 먹는 편이 아닌데, 탕수육 사라지는 속도가 너무 빨라 쉴 수 없었다. 다 먹고 나니 적당하긴 했는데, 탕수육을 중자를 시킬 걸 그랬다며 다들 아쉬워했다. 은평구에 살면서 이 가게를 모르면 안된다고 ..
아침에 컨디션이 좋지 않아 반차를 썼다. 점심도 퍼펙트바이트하지 못했다. 사람들에겐 날카로운 말을 내뱉었다. 활짝 핀 목련에선 떨어진 뒤의 지저분한 모습을 상상했다. 읽지도 않을 책 두 권을 들고 다녔다. 미루던 일 중 하나를 했지만 완수하진 못했다. 퇴근을 미루다 일이 터진 걸 수습했다. 만나고 싶은 사람에게 연락하지 못할 뿐 아니라 듀오링고 파트너로도 지정하지 못하는 자신을 마주했다. 집에 늦게 도착해 저녁을 걸렀다.아침에 주어진 여유 시간을 숙면으로 채웠다. 자신의 강박을 굳이 따르지 않았다. 언행을 반성하고 친구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기로 했다. 목련이 지면 벚꽃이 필 차례다. 주말의 강릉이 기대된다. 책 욕심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책 읽을 시간을 확보하고 싶다. 안 하는 것보단 하는 게 낫다...

⚠️ 전체 회차의 줄거리가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피하고 싶은 분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범죄 드라마지만 긴박감이 느껴지진 않는다. 인셀과 관련된 내용이다. 13살 꼬맹이가 연기를 잘한다. 원테이크로 촬영했다. 이 정도 정보만 가지고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총 4회로 짧긴 하지만, 정말 순식간에 보고 말았다. 원테이크 촬영이라 빠른 컷 편집이나, 시간의 순서를 뒤섞는 트릭을 쓰는 것도 아닌데, 이야기 자체가 가진 힘으로 우직하게 밀어붙여 재미를 주는 드라마였다.4회는 각각 사건 발생 후 1일 뒤, 3일 뒤, 7개월 뒤, 13개월 뒤를 다룬다.1화에서는 용의자를 체포하기 위해 경찰들이 집을 급습한다. 가족들은 어리둥절하는데, 아들의 혐의는 살인이란다. 경찰이 집에 문을 부수고 들어왔지만 체포 후에는 철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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