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사는 집은 거의 20년을 살았다. 아파트 분양 당시에는 비교적 늦게 입주했지만, 대부분 다른 집이 세를 준 것과 달리 우리는 내내 살았으므로 거의 터줏대감이나 다름없다. 우리보다 먼저 들어와 사시던 6층 동생 친구의 할머니가 가장 오래 계셨지만 돌아가신 지 몇 년 되어, 아마 우리가 이 아파트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일 것이다. 우리 집과 마주 보는 앞집에 20년 동안 여러 사람들이 살았지만, 인사를 하고 지내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낯을 가리는 편이기도 하고, 얼굴 볼 일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가끔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쳐 같은 층으로 올라가면 조금 어색하게 인사만 나누고 각자의 집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래도 낯을 익힐 정도는 아니었고, 어느샌가 다른 사람이 이사와 살곤 했다.그러다 갑자기 이웃의 얼..
나는 양고기를 싫어한다. 어떤 사람들은, 싫어하는 걸 잘 티를 내지 않는단다. 하지만 회식 장소를 양고기집으로 잡았는데, 내가 양고기를 잘 못먹는다는 걸 뒤늦게 아는 것보다는 미리 아는 게 낫지 않을까? 만약 어쩔 수 없이 양고기집으로 가게 된다면, 다른 메뉴들을 시켜 먹으면 서로 충족해서 맛있게 먹을 수 있다는 걸 합의하고 가는 게 낫지 않을까?좋아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도 때로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들었다. 취향을 평가받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걸 좋아한다고? 그래서 아마도 덕후들이 일반인 코스프레를 하는 것일테다. 내가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 중,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모르는 경우가 거의 없다. 대체로 이 좋은 걸 남들도 알아주면 좋겠다는 쪽이어서, 취향이 아예 다른 사람들에게도 일단 좋다고 ..
밤늦게 집에 도착하니 첫째 고양이 봄이가 달려 나왔다. 나에게 단 한 번도 골골댄 적 없고, 가끔 발치에서 잠을 자긴 하지만 상체 쪽으로는 단 한 번 몸을 기댄, 나를 아주 친밀하게는 여기지 않는 고양이다. 그래도 한 번도 만지지 못한 둘째 여름이와 달리, 내가 쓰다듬는 걸 좀 불쾌하게는 생각해도 허락해 줘 고맙게 여기고 있다. 근데, 한걸음에 달려온 봄이를 가만히 살펴보니 왼쪽 눈이 살짝 감겨 있었다. 눈두덩이가 부어 있었다. 모기에 물렸나 싶었는데 왼쪽 입가를 보니 상처가 있었다. 얻어터진 것 같았다. 범인은 여름이겠지. 봄이와 여름이는 꽤 잘 지내는 편이지만, 애정의 화살표는 한쪽으로만 흘러 일방적으로 여름이가 봄이에게 치대는 편이긴 하다. 그래도 봄이는 가끔 여름이를 그루밍해 주는데, 여름이는 ..
저 곧 이직해요. 라고 말하자, 친구가 내게 ‘프로 이직러’라고 말했다. 우리가 알고 지낸 5년 동안, 실제로 두 번 정도는 회사를 옮겼으니 그 말도 무리는 아니었다.사실 이번엔 이직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출퇴근 왕복 네 시간 걸리는 곳으로 회사가 이사 간다고 해도, 차를 몰고 다니거나 근처에 집을 구하는 옵션이 더 먼저였지, 회사를 옮기는 건 마지막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되리라 생각했다. 기본적으로는 나이 때문에 선택지가 많지 않을 거라 생각했고, 아무리 둘러봐도 지금보다 나은 조건의 회사는 보이지 않았다.그러던 중 정말 감사하게도, 위치나 업무 조건이 놀라울 정도로 좋은 회사를 H님이 제안해 주셨다. 나를 지금의 회사로 이끌어 준 것도 H님이었는데, 내게 귀인이 있다면 H님이 아닐까. 여러 군데 ..
많이 가진 사람은 소중함을 모른다.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다면 더욱 그렇다. 낭비할 줄만 알지, 아껴 쓸 줄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것의 소중함을 알기 위해서는, 때로는 없어봐야 한다. 서서히 그 가치를 깨닫는 귀한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모든 것을 잃는 최악의 상황에 처하고 나서야, 내가 가졌던 것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깨닫고 후회하게 된다. 이건 돈뿐 아니라, 모든 것에 적용되는 기본적인 메커니즘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잘 모른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것을 많이 가진 상태인지 객관적으로 판단할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인생은 게임이 아니다. 정해진 최대치도, 최소치도 없다. 노력한다고 반드시 얻는 것도 아니고, 원하지 않아도 갑자기 불어나는 경우도 있다. 어느 정도를 가져야 적당한지도 누..

써니와 기즈모는 이제 엄마 아빠만큼의 덩치만큼 자라났다. 보송보송하던 솜털이 사라지고 깃털은 매끈하게 정리되었다. 그 못생겼던 털보숭이들이 이렇게 멋지게 변했다는 게 정말 신기하다. 언젠가 흰머리가 될 예정이어서 그런지, 시크릿 투톤처럼 짙은 갈색 깃털 안쪽은 흰색털로 보인다. 진짜 어른이 되어 흰 머리와 흰 꼬리깃을 가지기까진 한참 멀었지만, 이제 진짜 새가 되어 날 준비가 거의 다 되었다.독수리는 10주에서 12주 사이에 첫 비행을 한다. 3월 초에 태어난 써니와 기즈모는 이제 11주 정도 되었다. FOBBV(Friends of Big Bear Valley) 그룹에서는 구글폼으로 언제 이들이 첫 비행을 할지 예상하는 설문을 받았다. 2022년에 태어난 스피릿은 5월 31일 새벽 5시 50분쯤 첫 비행..
허리를 다친 이후 한의원에서 추나 치료를 받고 있다. 다친 게 4월 중순이니 한 달이 다 되어간다. 한의원에서는 치료를 받는 동안 어떤 운동도 금하고 있는데, 달리기는 물론 스트레칭도 금지다. 얼마 전 피치 못할 이유로 잠깐 뛴 걸 제외하면 아무 운동도 하지 못하고 있다. 걷기도 하지 말라는 지시도 있었지만, 무리가 없다고 판단되는 선에서 피크민 정도는 계속하고 있다.한의원에서는 통증이 발생한 원인은 근육의 강한 뭉침으로 진단하고 2-3일에 한 번씩 치료를 권했다. 의사 선생님은 달리기를 했다고 해서 근육이 이렇게까지 뭉칠 수 있는지 의아해했다. 아마도 타고나길 근육의 긴장도가 높아서이고, 달리기를 하는 동안 안일하게 근육 풀어주는 걸 해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 달간 장요근과 중둔근을 자극하는 치..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읽자고 시작해, 어느새 어려운 책 함께 읽는 모임이 되어버린 '오붓'. 햇수로는 9년째 이어가는 최장 기간 진행한 책 모임이다. 몇 번쯤 모였을까 궁금해 정리를 해보니 60회 정도 모였다. 대학 졸업 후에 이렇게 자주 모이는 인연은 흔치 않다고들 한다. 처음 책 모임을 시작하자고 이야기했던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낯선 미술의 세계를 알고 싶었는데 함께해 줄 동지를 찾아 기뻤던 기억이 있다. 가끔 인원을 늘릴까 생각할 때도 있지만, 같이 밥을 먹고 카페로 갈 때 4인이 딱 적당하기 때문에 굳이 사람 욕심을 내지는 않으려고 한다. 대신 4명이 모이는 만큼 한 명도 빠짐없이 모일 수 있는 날짜를 정하고, 각자 일정이 생기면 부담 없이 다음으로 미룬다. 가끔은.. 아니 자주, 책을 급..

5월 11일 폭풍 같던 대회가 끝났다.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어 무사히 끝났지만, 과정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대회 전날 3시간만 자고, 당일에 온갖 실수들을 하고, 급변한 상황에 맞춰 설정을 바꿔가며 우당탕탕했다. 그래도 재미있었다고 말해주는 참가자들, 덕분에 끝날 수 있었다고 인정해 주시는 운영진들 덕분에 뿌듯하게 마무리를 했다.그렇게 이번 주는 평화롭게 휴식을 즐길 줄 알았건만 우리는 또 일을 저질렀다. 전 세계의 오리엔티어들을 위한 축제가 있어, 그 일원이 되기 위해 이벤트를 연 것이다. 어떻게 진행할지도 전혀 계획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장소와 시간만 정해 공지를 올렸다. 여기저기 알고 있는 매체로 순식간에 홍보를 했고, 다행히 짧은 시간 안에 거의 30명이 모아졌다.목요일 만나 대략 어떤 그..
며칠째 배탈로 고생하고 있다. 아무것도 안 먹기도 하고, 죽만 먹는데 그렇다. 딱히 탈 날만한 것을 먹지 않았는데 아프니 좀 억울하다. 몸이 피곤하니 아무것도 못하고 잠드는 일이 허다하다. 오래 자도 컨디션이 잘 회복되지 않는다. 그래서 잘 지내냐는 말에 흔쾌히 잘 지낸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에게 어떤 위로를 받고 싶었던 게 아닌데도 그랬다. 난데없이 물벼락을 받은 느낌이었을 그에게 심심한 사과를.문제가 발생하면 어떤 원인이 있었는지 밝혀내려 노력하는데, 몸에 대한 것은 쉽사리 알기가 어렵다. 자극에 둔해 언제 내 몸에 어떤 불편함이 있었는지 눈치채지 못한다. 뒤늦게 원인을 유추해 보고 바꿔보지만, 몸은 기계가 아니라 뭔가를 바꾼다고 해서 바로 해결되지 않는다. 원인을 잘못 파악했거나 이미 그 원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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