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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일기

1/17 다리 위 부는 바람

나비사슴 2025. 1. 18. 06:23

내가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닌 곳은 남북으로 낙동강이 흘렀다. 강 옆에는 거의 100미터가 되어 보이는 높은 둑이 쌓여 있었다. 평소에는 강물까지 내려가려면 꽤 한참을 내려가야 해서 그 높이만큼 비가 올까 의심이 들다가도, 여름 장맛비에 둑 높이만큼 찰랑거리는 강물을 보며 자연의 무서움을 느끼곤 했다. 내가 처음 그 마을에 갔을 땐, 6.25 때 폭파되었다는 다리 잔해가 강 아래 잠겨 있었다. 북한군이 대구까지 내려왔는데, 더 내려오지 못하도록 폭파했다는 다리 중 하나가 이거일 터였다. 내가 마을에 도착한 후 몇 년 후에 다리 잔해가 치워지고, 복구되며 인도교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우리 집에서 인도교까지는 2킬로미터가 조금 넘는 거리였다. 에어컨이 활성화되지 않았던 시기의 어느 여름밤, 우리는 돗자리와 수박을 들고 둑방길을 걸어 인도교로 갔다. 강물이 흐르는 다리 중간쯤에 가면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많이 부는 중간 자리는 인기가 많아 앉을자리를 찾기 힘들었다. 겨우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면 여름밤을 견디기 쉬웠다. 우리는 수박을 먹고 누워서 이야기를 나눴다. 가끔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앉는 다리 밑의 일렁이는 검은 물을 가만히 쳐다보곤 했다.

그런 다리를 보다, 서울에서 한강을 보고 매우 기겁했다. 한강의 다리는 거의 1킬로미터씩은 되는 긴 다리로, 자리는 많았지만 돗자리를 깔고 앉을자리는 없어 보였다. 한강은 다리 위가 아니라 잘 조성된 공원에 수많은 사람이 앉아 치킨을 뜯는 곳이었다. 그렇게 강이 크다 보니 온갖 지류가 있었는데, 우리 동네 불광천도 그중 하나였다. 100미터 남짓한 강폭이지만, 비가 오면 제법 물이 불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조심하라는 안내 방송이 반복되어 들리곤 했다. 어떤 날엔 강둑 아래 조성된 인도가 잠길 때도 있었다. 그럼 폐타이어로 만들어진 길이 불어 터져 다시 포장하기도 했다.

동네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집 앞에 다리가 생겼다. 해 담는 다리라는 멋진 이름이었다. 사람만 다니는 인도교였다. 다리 위를 걸으면 조금씩 흔들려 마치 배 위에 올라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작은 다리 중간에는 우수조망명소라고 쓰여있었다. 처음엔 여기서 뭐가 보인다고, 하며 비웃었지만 미세먼지가 없는 좋은 날엔 제법 산이 멋지게 보일 때도 있었다. 어느 여름밤엔 해 담는 다리에서도 돗자리를 만났다. 한 사람이 나와 앉으니 너도나도 나온 느낌이었다. 나는 돗자리를 깔고 앉진 않았지만, 다리를 지나가다 시원한 바람이 불면 가만히 서서 바람을 맞곤 했다. 낙동강으로 다시 돌아간 느낌.

불광천에 벚꽃길이 조성되고, 이런저런 운동기구와 자전거도로가 생기며 사람들이 많아졌다. 언제부터인지 새들도 많아져, 쉬운 탐조 장소가 되기도 했다. 산책하기 좋고, 가끔은 뛰기에 완벽한 곳이었다. 곳곳에 있는 다리 아래는 거울이 붙어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거기서 큰 소리로 노래를 틀어놓고 에어로빅을 하거나 K팝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춤 연습을 하기도 했다. 어떤 곳은 할아버지들이 모여 장기를 두었는데, 겨울엔 비닐을 설치해 바람을 막아 두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고, 볼 때마다 웃음이 터지는 모습은, 다리 난간에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종아리에 배긴 알을 풀어주는 거였다.

H가 불광천 이야기라며 전해준 ‘천변일기‘에 내가 좋아하는 이 풍경들이 모두 담겨 있었다. 사진으로는 느낌이 잘 담기지 않는데, 이 연필로 그려진 그림에는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모두가 좋아하는 모습이 비슷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내겐 시골에서 서울이라는 큰 도시로 올라와 정 붙이고 살아가는 데 이 불광천이 꽤 큰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그것 역시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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