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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일기

3/22 봄처럼 따듯한 집

나비사슴 2025. 3. 23. 07:41

날이 많이 따듯해졌다. 건대입구에 살던 J가 독립을 해, 지하철로 세 정거장 거리에 이사 왔다. 지도앱으로 50분, 빠르면 걸어서 40분으로 예상됐다. 겨울 내내 꽁꽁 얼어붙어 그 위를 걸을 수 있던 천이 녹았고, 백로는 물살을 헤치며 조심스레 걸었다. 산수유 꽃이 노랗게 피고, 파릇파릇한 풀들이 올라와 봄빛을 더했다. 산책을 나온 사람들, 땀 흘리며 뛰는 사람들, 자전거를 힘차게 굴리는 사람들이 불광천을 채웠다. 혹시 몰라 들고 온 겉옷은 진작에 벗고 따듯한 봄기운을 느끼며 파워 워킹을 했다.

12시 정각. 다들 도착해 있었다. J가 미리 음식을 준비해 둘 테니 더 일찍도 늦게도 아닌 12시에 오라고 해서 맞춰왔다. 하지만 그 말과 달리 이제 막 요리를 시작한 느낌이었다. 다 같이 잡채를 데우고, 파전을 부치고, 불고기 전골을 끓였다. 완성한 음식은 자취생답지 않은 예쁜 그릇에 담았다. 늦게 독립한 딸을 걱정하는 엄마의 마음이 느껴졌다. J는 계속 음식이 부족할까 봐 걱정했는데, 우리에겐 충분하고 넘쳤다.

음식을 다 먹고, J가 예약해 둔 케이크를 가지러 나갔다. 10분이 걸린다고 했다. 그 사이에 B와 H가 손 빠르게 설거지를 했다. J가 그냥 놔두라고 신신당부했으나, 산더미같이 쌓인 그릇이 눈에서 거슬린다며 작당모의를 하듯 해치웠다. 거의 마무리를 할 참이었는데 J가 두 손 가득 케이크를 들고 돌아왔다. 물을 끓여 커피를 내리고, 차를 우리며 본격적인 책 모임을 시작했다.

이번 책은 ‘정의란 무엇인가’였다. 2009년에 처음 출간된 책이다. 다들 책장에 고이 모셔두었던 책을 꺼내 읽었다고 했다. 20년 전처럼 발제를 내지 않지만, 느슨하게 이야기를 하는 이 시간을 좋아한다. 책에 대한 이야기, 옛날 친구 이야기, 케이크 맛있다는 이야기(먹기를 권함), 덕후력에 대한 이야기, 먼 길로 돌아갔나 싶었는데 또다시 책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온다. 새벽 내내 벼락치기로 읽었지만, 이렇게 모임을 하고 나면 책의 내용 중 일부는 오래 남는다.

집주인인 J가 5시 반에 종로에서 약속이 있어 먼저 자리를 비웠다. 남은 셋은 4시 40분에 떠나는 J를 밝은 얼굴로 배웅을 한 뒤, 주인 없는 집에서 또 열심히 수다를 떨었다. 점심과 디저트를 먹으며 분명 배가 많이 불렀는데, 어느새 배가 고파졌다. 입만 열심히 움직였을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에너지가 소진되었나 보다. 남은 파전 반죽을 꺼내 부쳤다. 파전으로 연료를 충전하고, 7시 넘어서까지 떠들었다. 마지막 설거지는 내가 했다. 남의 집에서 술 취해 설거지를 한다며 거품 가득한 그릇을 남기고 온 전적이 있어 더 조심스럽고 정성스레 그릇을 닦았다.

다음에도 우리 모두가 주인이 된듯한 이 집에서 모이기로 했다. 언젠가는 옹기종기 모여 영화를 보자고도 했다. 99세까지는 아니더라도 팔팔한 순간에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다음이 있으리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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