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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의 단순포진 때문에 먹었던 항생제와 감기로 처방받은 항생제는 확실히 달랐다. 병원에서 타온 약을 먹자마자 우물이 마르듯, 코와 목이 건조해졌다. 열이 내리자 머리가 조금 맑아졌다. 아직 컨디션은 정상은 아니지만, 약의 기운을 빌려 오늘의 시 필사 모임은 참석하기로 했다. 어제 모임 후기가 너무 궁금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어제 호랑이 굴로 떠밀기는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내가 같이 갔다면 마시님을 신경쓰느라 정작 나는 모임에 집중하지 못했을 테고, 마시님도 나에게 의존했을 것이다. 낯선 환경에 홀로 던져진 덕분에, 적응이 더 빨랐던 것 같다. 마시님은 처음에는 분위기 파악 겸, 그리고 발언권 획득의 어려움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지켜만 보았지만, 나중에는 조금씩 말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모임 책이었던 '저 이승의 선지자'를 로맨스로 보는 입장과 아닌 입장이 나뉘어 처음에는 강렬히 부딪히다가, 나중에는 또 로맨스파끼리 갈라져서 논쟁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다들 목소리를 높이며 자기가 옳다고 떠들었을 것이 눈에 선해 웃음이 났다. 마시님은 평소에 현실과 가까운 이야기들을 많이 접하는데, SF와 같이 비현실적인 세계를 다루는 책들을 조금 더 읽어보고자 모임에 참여하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마시님의 독특한 캐릭터가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시 필사 모임이 아니더라도 앞으로 계속 볼 수 있다고 하니, 조금 기뻤다.
시 필사 모임은 언제나와 같이 근황토크부터 시작했다. 마시님은 SF 모임 이야기를 해주었고, 향유고래님은 반려견 두 마리와 함께 부산에 다녀온 이야기를 해주셨다. 나도 반가워 부산 여행을 다녀왔다고 이야기했다. 부산 여행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부산시민공원의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하니, 부산 출신인 향유고래님도 흥미로워했다. 아내 되실 분의 집이 바로 공원 근처라 다음에 꼭 역사관에 가보시겠다고 했다. 근황을 나눈 뒤엔 언제나처럼 30~40분 동안 필사할 시를 골라 적었다.
이번에 선택한 첫 번째 시는 <미신>이라는 시다. 원하던 것은 얻지 못하고 얻고자 하지 않는 것을 얻게 되는, 그 무엇하나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이지만, 여백으로만 남은 청춘에 뭐라도 해볼걸, 이라고 후회하는 내용이었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다. 우연히도 마시님도 동일한 시를 선택해, 각자의 목소리로 낭독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전에 선택했던 시들에 비해 제목과의 연관성을 찾기 어려웠는데, 다른 시들도 비슷한 게 많다는 게 시알못인 내 기준 이병률 시인에 대한 분석이다.
두 번째 선택한 시는 <무엇을 제일로>였다. 세상이 멸망할 때 사랑하는 사람의 단 한 가지를 가지겠냐면 무엇을 가지겠냐는 물음에, 어느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욕심쟁이의 시였다. 사실 이 시집을 여러 번 읽으면서도 이 시를 계속 지나쳤던 이유는 '하나라도 가지면 다행이지, 뭘 그렇게 욕심껏 다 가지려고 하냐'라는 반감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이번에 읽을 땐, 왠지 마지막 순간에 잘라둔 짱구의 털이 생각나 적어보았다. 비록 다시 만나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손에 남아있는 작은 흔적이 위안이 된 적이 있다. 그때는 설명하기 어려웠던 그 감정이, 시를 읽으며 선명하게 떠올랐다. 비싸더라도 스톤으로 남겨두는 이들의 마음도 조금은 이해가 된다.
각자 시를 공유하고 나서는, 자연스럽게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나눴다. 나는 마침 읽고 있던 다큐멘터리 '성덕'의 감독이 쓴 에세이를 이야기했고, 자연스럽게 아이돌판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그러자 마시님이 오랫동안 덕후를 관찰하며 쌓아온 깊은 덕력을 꺼내 강의를 시작했다. 특히 NCT나 TripleS와 같이 파레트에 있는 물감들을 여러 유닛으로 조합해 활동하는 낯선 방식에 대해 아주 쉽고 체계적으로 설명해주어, 이제껏 알지 못했던 분야에 대해 코끼리 코 정도는 더듬을 수 있게 되었다. 나와 향유고래님은 무릎을 다소곳이 모으고 얌전히 들었고, 향유고래님은 뉴진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추가 질문까지 했다. 그리고 이야기가 흘러 흘러 마시님이 프레임에 갇힌 영상 매체를 잘 보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프레임 밖의 이야기가 너무 궁금해 집중이 잘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5층 건물을 돌아다니면서 보는 슬립 노 모어에 대해 소개했고, 8월에 국내에서 볼 수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마치 영업자가 된 기분이었지만, 새로운 문물을 소개하는 건 늘 즐겁게 느껴진다. 우리는 모임 종료 시간인 10시가 넘었는지도 모르고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부산의 나락서점에서 산 '시 읽는 법'이라는 책에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시를 감상하는 방법이 나온다. 그중 하나는 시인을 알고 읽는 것인데, 이제 마지막 시간을 앞두고 있으니 뒤늦게나마 이병률 시인에 대해서 찾아보았다. 이름이 왠지 익숙하다 했더니,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끌림'과 같이 힙한 감성의 에세이를 쓰신 분이었다. 도서관에서 인기가 많아 살짝 들춰봤지만, 몇 자 읽지 못하고 도로 덮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이번엔 안 해보는 것을 해보는 과정이니, 한번 읽어보기로 마음먹었다. 다음 시간까지 나만의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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