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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5/5 정신을 어디에 두고 사는가

나비사슴 2024. 5. 8. 12:33

오랜만에 영화관 나들이를 하게 되었다. 범죄도시에 큰 관심은 없었지만, 배우 무대인사를 하는 영화표가 있어서 가보기로 했다. 연휴 동안 가장 많은 비가 내릴 것으로 예정된 날이었다. 홍대에서 오후 4시 15분 영화였고, 집에서는 3시 반쯤 나가기로 했다. 내 생명과도 같은 보조배터리가 들어있는 외출용 패키지 파우치를 가방에 넣고, 사연이 있는 과일 무늬 우산을 들고 나섰다. 원래는 고양이 무늬 우산이었는데, 어느 식당에서 누군가 내 고양이 우산을 가져가고 과일 무늬 우산을 놔두었다. 무늬 외엔 재질이 너무 똑같긴 했다. 겉 비닐은 고양이 무늬지만, 꺼내면 과일이어서 볼 때마다 속이 상하는 우산이다.

엘리베이터에서 파우치를 열어 이어폰을 꺼내 핸드폰에 꽂았다. 집에서 나오니 비가 꽤 내리고 있었다. 고양이 무늬 우산 겉 비닐은 가방에 넣었다. 오늘은 출근하는 날이 아니어서 가는 길에 듀오링고를 할 참이었다. 처음엔 영어만 했지만, 스웨덴어, 중국어, 아라비아어도 조금씩 하고 있다. 아라비아어는 어떤 언어보다 낯설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는 방식도 그렇고, 글자도 붙여 쓰는 방식이라 배우면서도 내가 이 글자를 읽게 될 날이 있을까 싶다. 6호선을 타고 가다가 합정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고, 홍대에 도착하는 짧은 시간 동안 정말 열심히 했다.

지하철에서 내려 우산을 쓰고, 친구가 영화관에서 만나자고 보낸 카톡에 곧 가겠다고 답변했다. 몇 블록을 걸어 가 영화관 건물로 들어왔다. 영화 시작 전이라 사람들이 많았고 조금 기다리다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근데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던 그 순간, 내 손이 너무 가볍다는 걸 알았다. 나는 이어폰을 끼고 듀오링고를 하고 있었고, 오른쪽 손목엔 접은 우산이 있었다. 근데 왼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내 가방이 없었다.

언제부터 가방이 없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분명 이어폰을 꺼냈으니 집에서는 들고 나왔다. 지하철에서 서 있다가 가방을 떨어뜨리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앉아있다가 가방을 무릎 위에 놓고, 내릴 때 일어나며 잊었다는 게 그나마 그럴듯하다. 하지만 언제 그랬지? 6호선을 탈 때 사람이 많았고, 문쪽으로 가서 서 있었던 것 같은데 중간에 자리가 비어 앉았을까? 합정에서 갈아타서 홍대로 갈 때는 짧았는데 내가 그 짧은 순간에도 자리가 있으니 본능적으로 앉았나? 잃어버린 경위가 너무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솔직히 화가 나지도 않았다. 다만, 영화를 볼 때 웃음이 많이 나지는 않았는데, 영화가 내 취향이 아니라서인지 내가 가방을 잃어버린 직후여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Lost112 앱을 다운 받았다. 잃어버린 항목을 적어야 했다. 아이보리색 여성용 가방. 가방 속에는 얼마 전에 샀던 분홍색 파우치가 들어있었다. 최근에 보조배터리도 같이 넣으려고 샀던 새로 산 파우치였다. 그 안에는 무선충전이 되는 보조배터리, 파우치와 함께 샀던 연보라색 아이폰 충전선, 선물로 받은 립글로즈, 아카시아향 롤온 퍼퓸, 운전면허증, 체크카드 2개, 현금 만 원, 만일을 대비한 진통제 몇 개. 그리고 이제 껍데기만 남아있던 고양이 무늬 우산 겉 비닐.

체크카드 2개는 바로 분실신고를 했다. 한 개는 얼마 전에 모임통장용으로 새로 받은 거였는데, 이렇게 금방 잃어버리다니 다시 발급받을 의지가 크게 생기진 않았다. 운전면허증은 2021년에 잃어버리고 재발급받은 거였는데, 그걸 또 해야 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가장 타격이 큰 건 보조배터리였다. 무선 충전도 되고, C타입과 A타입 usb 모두 충전이 가능하며, 무게도 적당했고, 숫자로 남은 충전 시간을 알 수 있어 매우 아끼던 것이었다.

집에 돌아오는 내내 Lost112 앱을 새로고침했다. 가방이 고가인 것도 아니었고, 물건들도 내게나 의미 있지 가져간 사람에게 도움 될 것이 없어 잘하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 비 오는 날이라 우산들이 잔뜩 올라왔고, 온갖 지갑과 가방들, 심지어 쇼핑백도 올라왔는데 내 가방은 없었다. 왠지 영원히 찾지 못할 예감…

술을 마시지 않고서도 태연하게 가방을 잃을 수 있으니, 조금 더 정신을 차리고 살자는 다짐을 가슴 깊이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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