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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전 1년을 함께 일했고, 퇴사 후 5년 뒤 한 번 뵈었던 H님을 오랜만에 만났다. 함께 일했을 때도 따뜻한 마음, 진심 어린 조언, 세련된 취향으로 늘 좋아했던 분이다. 14년 전에 친구를 맺은 스웜으로 늘 동태를 염탐하고 있기도 했다. 그런데 50일 전에 듀오링고에 가입하신 걸 보고, 반갑게 친구 신청을 하고 같이 함께 불꽃을 태웠다. 그리고 "50일 정도는 성실히 해보고 만나보고 싶었다"며 먼저 연락을 주셨다. 늘 좋은 영향을 주신 것에 감사하며 한 번쯤 연락을 드리고 싶다고 생각해 온 지 몇 년이 되었기에, 감사한 마음으로 반가이 약속을 잡았다.
만난 곳은 H님의 회사였다. 지하철과 바로 연결된 건물이었는데, 느낌이 범상치 않았다. 안도 타다오가 설계한 건물이라고 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노출 콘크리트가 그제서야 눈에 들어왔다. 건물 곳곳의 벽이 반듯하지 않고 조금 둥근 형태였는데, 알고 보니 고래의 뱃속처럼 조금 비스듬한 타원 모양의 긴 공간이 건물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건축에서는 하중 때문에 똑같은 반지름의 동그라미보다는, 이런 타원 모양이 더 난이도가 높다고 했다. 그 외에도 건물과 관련된 이런저런 뒷이야기를 들으며, 왠지 건축 투어를 하는 느낌이었다.

H님은 내가 예술의 세계에 첫 발을 디딜 수 있게 도와주신 분이다. 그전에는 막연히 미술관이 어렵게 느껴졌고, 내가 즐기기에는 거리가 먼 고급 취미라고 느꼈다. 하지만 리움에서 도슨트로 활동하시던 H님의 설명을 듣고, 미술이란 결국 자신의 취향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리움에서 아니쉬 카푸어를 만난 날, 나는 직관적으로 확 느낄 수 있는 강렬하고 큰 작품에 끌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전히 피에르 위그와 같은 작가의 작품을 보면 어렵다고 느끼지만, 이제는 있는 그대로 느껴보려는 자세를 가지게 되었다.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모임에 참여하지 말고 직접 만들어보라'고 조언을 해주신 것도 H님이다. 덕분에 친구들과 미술사 스터디를 시작했고, 지금까지 이어지며 삶의 만족도를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H님은 정작 그 조언을 기억하시지 못했다. 다만, 내가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긴다고 느껴서 그런 말을 했던 게 아닐까 짐작하셨다. 10년도 훨씬 전의 나에게 그런 모습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나를 그렇게 기억해 주시는 것이 놀라웠다.
그동안 H님에게 연락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계속 했지만 내내 미뤘고, 결국에는 연락을 주실 때까지 기다렸다.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을 즐거워하면서도 먼저 연락하는 일은 잘 없어,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큰 단점이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없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부채감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알아봐 주는 것이 참 감사했고, 나 역시 행동하지 않는 마음에 대해 너무 가혹하게 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 연락하고 싶다'는 말에 '어떻게 지금보다 더 나을 수 있냐'고 답한 친구의 말처럼, 나는 H님에게 너무도 당당히 지금 매우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고 전했다. 한때는 내가 포기한 것에 대해 미련이 남아, 끝내 성취하지 못한 스스로를 평가절하한 적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포기한 것 역시 내 선택이었다는 것을 안다. 나는 내가 선택한 길에서 가장 즐거울 수 있는 방향으로 꾸준히 걸어왔다. 늘 햇살같이 밝음을 유지하지 못하지만, 넘어졌어도 빠르게 일어나 걸어갈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 나를 좋아하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내가 H님에게 느끼는 것처럼 나 역시 누군가에게 몇 년에 한 번을 만나더라도 반가운 사람, 만났을 때 즐거운 사람, 집에 돌아가서 그 순간을 떠올렸을 때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동안 내게 '롤모델이 누구냐'고 물으면 우물쭈물했지만, 이제는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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