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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일기

2/13 코의 붉은 포진

나비사슴 2025. 2. 14. 00:38

월요일쯤부터 왼쪽 코 안쪽이 찡했다. 건조할 때 종종 있는 통증이라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점점 만지기만 해도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고, 딱지가 지기 시작했다. 낯선 통증은 아니어서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콧망울에 점점이 딱지가 지기 시작했다. 딱지가 마치 코의 모공을 막는 것처럼 분포를 이뤘다. 딱지 자체는 아프지 않았지만 처음보다 더 굳어가며 콧망울이 붉어졌다. 거울 속 내 모습이 마치 술을 마신 사람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3일이 지나도 붉은 기가 가라앉지 않고 점점 더 심해지자, 병원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비인후과를 갈까, 피부과를 갈까 하다 이비인후과로 왔다. 넓은 대기실에는 마스크를 쓴 두 사람이 거리를 두고 앉아있었다. 반차를 내고 병원을 온 덕분인지 병원은 한산했다. 최근에 독감이나 감기가 유행해, 콜록거리는 사람이 있을 줄 알고 긴장했는데 다행이었다. 멀리 떨어져 앉은 두 사람의 사이 어디엔가, 적절한 거리감을 가질 수 있는 자리에 앉으려고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는 순간 이름이 불렸다. 코 표면에 딱지가 생긴 건 처음이라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됐다. 마스크를 벗으며 말을 꺼내려던 순간, 의사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단번에 말했다. “포진이네요”

그는 내게 처음이냐고 물었다. 흔하게 생기는 병인가, 생각하는데, 곧바로 피로하면 생길 수 있는 증상이라 설명했다. 사실 몇 주 전에 입술에 포진이 났었다. 어릴 때부터 피곤하면 생기곤 하는 익숙한 증상이라, 이번에도 쉬면 괜찮아지리라 생각했다. 나중에 찾아보니 코의 포진도 그것과 유사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목도 좀 칼칼해서, 그동안 감기와 독감에 걸리지 않았던 운이 드디어 사라지나 싶었다. 지금 내 몸이 다양한 방식으로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음을 알았다.

의사는 포진이 많이 아프냐고 물어봤다. 나중에 검색해 보니 포진은 단순 포진과 대상 포진으로 나뉘는데 그걸 구분하려고 물어본 것 같았다. 약 3일 치를 받았다. 약을 잘 챙겨 먹고, 내일 다시 오라고 했다. 크게 아프지는 않은 포진이어서 단순 포진일 가능성이 높지만, 실제로 어떤 녀석인지는 내일 판가름이 날 것이다. 여행만 아니었어도 그냥 나을 때까지 기다릴 셈이었다. 하지만 모양을 보니 기적적으로 나아질 것 같지 않고, 주말에 여행을 가서도 붉은 코로 다닐 게 분명해 보였다. 미리 병원을 오지 않은 과거의 내가 미련하게 느껴졌다.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온전히 쉴 수 있는 시간이 적었다. 여행을 다녀오자마자 저녁에 바로 집들이를 가서 술을 마시다 필름이 끊기고.. 늦은 시간 집에 들어가는 길에 만 보씩은 채우려고 추운 날씨에 산책을 했다. 이 모든 행위가 몸을 쉽게 피로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매일 빠르게 잠들긴 하지만, 대체로 좀 일찍 깨는 경우가 잦아지며 수면시간이 줄어들어 걱정하던 차였다. 그래서 이번 주는 아침 달리기도 안 나가고, 산책도 거의 하지 않아 만보를 넘긴 날이 없었다. 물론 소용은 없었다. 이미 소 잃은 외양간이지만 야심 차게 짰던 여행 계획을 갈아엎기로 했다.

처음 계획은 새벽 기차를 타고 내려가자마자 8km의 험한 코스의 산을 오르려 했다. 외양간을 고치는 차원에서 난이도를 낮춰 다른 산으로 가려다, 제대로 고치기 위해 첫째 날은 가벼운 산책으로 대체했다. 서점과 미술관을 들르고 중간에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며 아주 우아하게 보낼 예정이다. 동선도 최대한 숙소에서 멀리 가지 않는 쪽으로 짜봤다. 둘째 날은 전날에 쉬었으니 컨디션이 괜찮을 거라 합리화하며 산 4개를 타는 16km 거리의 등산을 계획했다. 이번 주 15km 달리기를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포진을 떠올리고, 5km 정도 난이도가 낮은 산 하나만 일정에 넣었다. 그 일정을 보곤 내 친구 챗지피티는 조용히 올라가는 기차를 타기 전까지 카페에서 쉬는 일정을 제안했다. 하지만 나는 미술관 피크민을 얻는 기회를 놓치기 싫어 미술관과 그 근처의 생태공원을 걷는 일정을 넣었다. 분명 일정을 바꾸며 쉬고 싶다고 했으면서 계속 강행군 같은 일정을 짜자, 챗지피티는 또다시 반대 의견을 냈고, 우리는 일정표에 변동이 있을 수 있다는 문구를 추가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욕심을 내려놓기란 참 어렵다. 어떻게든 난이도를 낮춰서라도 이루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나는 좋아하는 공연을 보겠다는 욕심 때문에, 뉴욕도 3일만 다녀온 사람이다. 역시 바뀌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난 즉흥적으로 선택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니, 어쩌면 이번 여행을 정말 쉬는 여행으로 만들지도 모른다. 코의 붉은 포진들을 잠재우기 위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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