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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운 여름날 산에서 뛰고 난 후 계곡물로 풍덩한다는 콘셉트의 장수 쿨밸리 트레일 레이스. 17.7km라는 긴 거리를 달려본 적이 없어 전혀 갈 생각이 없었으나, 캠핑을 같이 하자는 제안에 큰 맘을 먹고 신청했다. 긴 거리를 달리는 훈련은 하지 못했지만, 더운 날 뒷산도 달려보고 트랙에서 주에 10킬로씩 달리며 체력을 키웠다.
보통 아무 생각 없이 짐을 싸지만 이번에는 꽤 준비를 했다. 캠핑을 위해서는 의자를 샀다. 2박 3일 동안 허리를 기대앉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먹을지는 모르겠지만 밑반찬이 필요할 것 같아 오이지와 열무김치를 샀고, 가볍게 주워 먹을 방울토마토도 샀다. 같이 가는 S님이 쿠팡에서 이것저것 밀키트를 시켰는데, 아침에 현관에 나가보니 쿠팡 박스 4개가 쌓여있는 진풍경을 보았다. 식료품은 집에 굴러다니는 스티로폼 박스에 그동안 냉동실에 모아두어 꽝꽝 얼린 아이스팩과 함께 넣어 갔다. 또 혹시 몰라 작은 도마, 그동안 사두고 한 번도 못쓴 불 바람막이, 사케가 담겨있던 작은 유리컵, 허브솔트도 들고 갔다. 내가 챙길 수 없는 물품은 다른 사람들에게 요청했다.
차를 몰고 가니 짐이 한도 끝도 없이 늘어났다. 전날 새벽까지 짐을 싸고, 1차로 차에 짐을 실어놓았다. 회사에서 반차를 쓰고 집에 오니 3시였다. 이것저것 식료품과, 미처 준비하지 못했던 물품들을 끌어모아 2차로 가득 짐을 실었다. 함께 차를 타고 내려갈 두 사람도 짐이 많아 차로 데리러 가기로 했다. 3명 짐인데도 차가 꽉 찼다. M오빠가 새벽에 미리 내려간다고 한 게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만약 한 차로 내려갔다면 백미러가 보이지 않았을 것 같다.
차에는 100킬로 정도만 달릴 기름이 있어, 동네 주유소를 미리 들렀다. 근데 주유소를 다니며 처음으로 와이퍼 영업을 당했다. 고민했지만, 최근에 와이퍼에서 소리도 났고 가격도 내가 굳이 찾아 구매하고 교체하는 것을 고려하면 나쁘지 않다 생각해 그냥 변경했다. 지금 내 와이퍼는 1세대인데, 영업당한 와이퍼는 실리콘이 있는 3세대라고 했다. 아빠는 어차피 교체하는 부품이라 그렇게까지 좋은 것을 사지는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그래도 3세대는 조금 더 오래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장수까지는 밀리지 않을 경우 4시간 정도가 걸린단다. 나는 4시쯤 서울을 떠나게 되어 한참 밀릴 시간에 도로에 있을 예정이었다. 다행히 크게 밀리지는 않아 8시 반을 조금 넘어 도착했다. 각자 텐트를 먼저 치고, 사온 밀키트로 저녁 준비를 했다. 숙주차돌볶음과 부추전을 샀는데, 밀키트 치고 둘 다 손이 많이 가서 준비하는 사람에게 불평이 좀 나왔다. 게다가 부추전은 왠지 바닥에 계속 붙어서 몬자야키처럼 긁어먹었다. 그래도 둘 다 맛이 있었다. 양이 좀 적었기 때문에 라면을 끓여 두 봉지 정도를 먹었다. 미리 사온 식료품은 다 동이 나서 내일 장을 봐야겠다 생각했다. 다음날 8시에 달려야 하기 때문에 술은 적당히 먹고 잤다.
대회장은 캠핑장에서 차로 20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대회장에서 캠핑장으로 17.7km를 달리고 도착해서 셔틀버스를 타고 대회장으로 다시 가 차를 가져와야 한다고 했다. 그저 도착해 물에 풍덩 빠지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어쩌다 보니 내가 그 차의 운전자가 되었다. 처음 달려보는 긴 거리, 내가 녹초가 된 상태에서 문제없이 잘 다녀올 수 있을까 좀 걱정을 했다.

코스는 초반에 오르막이 있어 산 정상을 갔다가 내려오고, 후반에 완만한 오르막을 올랐다 내려오는 코스였다. 처음엔 CP가 하나인줄 알고 물을 2개 챙겼는데, CP가 2개였다. 4.8km 지점,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CP1이 있어 쓸데없이 물을 많이 챙겼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에 처음으로 산 트레일 베스트에, 소프트 플라스크 물통도 샀는데, 다 처음 쓰는 것들이라 이용이 원활하지 않았다. 뛰면 물통이 같이 날뛰어 마음껏 뛰기 힘들었고, 물통에 입을 대고 쭉 빨아 수분 섭취를 해야 하는데 물이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 물통 하나는 플라스틱 물병이어서 첫 CP에 도착하기 전까지 말라죽지 않았다.
그동안 쌓아온 체력이 괜찮았는지, 오르막도 힘들긴 하지만 중간에 쉬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한 사람씩 제치는 재미가 있었다. CP1은 정상에 닿기 전의 논개활공장이었다. 뛰어내리는 곳이라 논개라 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논개가 유명인사라 그런지 네이밍이 좀 갸우뚱해졌지만, 탁 트인 언덕에서 내려보는 풍경은 꽤 괜찮았다. 먼저 도착해 있던 S님과 함께 내 뒤에 오는 C언니를 기다렸다. 같이 수박도 먹고 물과 이온음료도 마음껏 섭취했다. 물을 너무 많이 먹으면 출렁거렸던 거 같긴 하지만, 그만큼 땀을 흘릴 테니 많이 먹어두는 게 좋을 듯했다.
CP에서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2킬로 정도였지만, 그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CP 전의 오르막보다 중간중간 쉬는 사람이 많아졌다. 나는 쉬지 않고 올라, 정상부터는 내리막을 계속 뛰었다. 내 앞에 뛰는 세 사람, 그리고 뒤에 뛰는 두 사람 정도가 비슷한 속도였던지 꽤 길게 같이 다녔다. 마치 크루가 된 느낌. 그러다 앞에 뛰던 사람들이 중간에 쉬면서 선두가 되었다. 내가 선두가 된 즈음부터 무한 계단이 나왔는데, 오르막이 아니라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계속해서 빠르게 내려갔는데 허벅지 근육이 단단해지는 게 느껴졌다. 이때즈음부터는 거의 혼자가 되었고, 평지부터는 혼자 뛰기 시작했다.
뛰기 좋은 날씨였다. 더웠지만, 꽤 구름이 껴있어 햇빛으로 인한 대미지는 적었다. 산속을 달리니 더 괜찮았다. 하지만 평지로 내려와서는 그늘이 많지 않았다. 캠핑장 옆 마실길을 뛰는데, 영 뛸 마음이 들지 않아 몇 번은 걸었다. 게다가 CP2의 위치가 골인점 바로 옆이라 기운이 쭉 빠졌다. CP에서 용소계곡이라는 곳까지 갔다가 반환점을 돌아오는 코스였는데, 반환점을 향하는 선수들과 돌아오는 선수들의 표정이 너무 달랐다. 나는 아직 6킬로 정도를 더 뛰어야 하는데, 다 뛴 선수들이 보이니 밝은 얼굴이 얄밉기까지 했다. 가는 길이 너무 다리가 무거웠는데, 반환점을 도니 그 이유를 알았다. 은근한 오르막이었어서 뛰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래도 오며 가며 지친 선수들에게 힘차게 파이팅을 외쳤고, 3시간 18분으로 경기를 마쳤다. 전체 선수 중 156위, 여자 선수 중엔 32위였다. 신청자는 500명이었다는데 실제 몇 명이 뛰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제한 6시간 경기에서 이 정도면 선방을 한 것 같다. 17-18일에 각각 10킬로씩 뛰는 대회를 나갈 예정이어서 걱정이 많았는데, 괜찮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작년엔 아파서 영영 못 뛸까 봐 걱정했는데, 피티를 받으며 근육운동을 했고 덕분에 전보다 더 힘이 생긴 것 같아 전화위복이라 생각이 들었다.

차를 가지러 대회장에 간 김에, 근처에 있는 하나로마트에서 장을 보기로 했다. 나 혼자 장을 보는 거라, 뭘 사야 할지를 주문받았고, 떡볶이, 고기, 야채 등등을 골고루 사서 갔다. 미처 사지 못했던 김치나 얼음은 캠핑장 매점을 이용했다. 땀에 쩔어있는 상태여서 빨리 물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배가 고픈 게 우선이어서 떡볶이로 배를 채우고, 싸게 판다는 한우를 구매한 뒤 물놀이를 하러 갔다.
원래 물에서 노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워낙에 덥기도 하고 옆의 계곡이 무릎 정도까지의 깊이의 물이어서 걱정 없이 들어갔다. 해가 점점 지고 있기도 했고, 물도 꽤 차서 몸 전체를 담그고 있으면 덜덜 떨리는 정도였다. 가볍게 엉덩이만 담그고 있었는 데 그것만으로도 더위를 날리기는 충분했다. 우리는 사람 많은 곳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대회에서 마련해 둔 워터밤 뺨치는 EDM파티보다, 소소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게 더 좋았다.
저녁은 고기파티였다. 한우, 삼겹살, 된장찌개에 숙주볶음까지 먹으려 했는데, 된장찌개도 남기게 되어 숙주볶음도 아침에 먹기로 했다. 배가 차지 않는다는 치즈도 구워 먹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슬슬 졸렸다. 두 사람이 충동적으로 사서 텐트를 화려하게 꾸민 조명, 배부름, 적절한 알코올, 낮에 한껏 끌어다 쓴 체력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12시가 되기도 전에 잠든 것 같다. 중간에 매미 소리가 너무 커서 깼지만, 그래도 8시까지 푹 잤다.
아침도 푸짐하게 먹고, 남은 수박 반통을 열심히 잘라두었다. 전날보다 해가 더 쨍쨍한 느낌. 어제 빨아둔 빨래를 햇빛에 두니 바싹 말라버렸다. 우리도 마르는 느낌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얼굴에서 땀이 흘러 바닥으로 뚝뚝 흘렀다. 다들 타프 그늘을 베이스 삼아 왔다갔다하며 각자의 텐트와 이리저리 늘어져 있는 짐을 아주 느리게 쌌다. 차에 모든 걸 다 집어넣고는 2차 물놀이를 갔다. 전날처럼 풍덩하지는 않았고, 발을 담그고 잘라온 수박과 토마토를 순삭 했다. 캠핑장 다음 예약자가 전화를 걸 때까지 물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장수 시내에 나가 중국집에서 콩국수를 먹고, 카페에서 차 한잔을 하며 부족한 잠을 채운 뒤, 4시 즈음 서울로 출발했다. 비 예보가 있었는데, 딱 출발할 시점부터 비가 왔다. 고속도로에서는 비가 미친 듯이 쏟아지다 갑자기 그치는가 싶다가, 또 엄청 굵은 빗줄기가 차체를 때리기를 반복했다. 영업당해 교체한 와이퍼가 제 역할을 했다. 다들 피곤해해서 한번 휴게소에 들러 커피를 한잔씩 했다. 내려올 때와 비슷한 시간에 서울에 도착했다. 차가 밀리긴 했지만, 크게 고생하지 않고 다녀와 다행이라 생각했다.
캠핑과 트레일러닝에 대한 즐거움을 만끽한 주말. 더 사고 싶은 물품들, 더 잘 달리고 싶은 욕심들을 저장해 두고, 다음에 또 즐거운 기억을 남기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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