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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일기

5/30 어머니의 우유

나비사슴 2024. 5. 31. 19:54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다섯 번째 감상 완료. 다음 주에 퓨리오사를 볼 생각을 하고도, 분노의 도로는 워낙 많이 봤기 때문에 다시 볼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책과 술을 같이 즐기는 책바에서, 술과 함께하는 영화감상 모임을 진행하길래 급 신청을 했다. 알콜 음료 2잔과 간단한 안주를 제공하는 모임이었다. 알콜 음료는 영화에 따라 달라지는데, 책바의 시그니처 칵테일과 영화에서 영감 받은 칵테일이라고 했다. 사실 홍보할 때 캡처 화면이 우유병(사실은 모유병…)을 들고 있는 임모탄의 모습이어서, 왠지 우유를 넣은 칵테일을 먹지 않을까 추측하긴 했다.

나까지 총 7명이 신청했고, 지각을 하는 바람에 내 자리는 왕 자리였다. 다들 피해서 남은 자리에 앉은 거였지만 영화를 보기엔 좋은 자리이긴 했다. 영화를 보기 전 서로 간단히 이야기를 나눴는데 나처럼 매드맥스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거의 10년 전 영화다 보니 다들 기억이 가물가물한 듯했고, 한 분은 매드맥스를 처음 보신다고 해서 그분이 다 보고 난 뒤 어떤 감상을 가질지가 매우 궁금했다. 첫 잔은 영화를 보기 전에 마셨다. 기네스(기름 느낌)에 우유와 베일리스를 잔째 빠뜨려 마시는 술을 빠르게 원샷했다. 우유가 술과 섞이면 뭉쳐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오랜만에 본 매드맥스는 이번에 보니 영상이 아주 조금 조잡해 보이는 부분이 있었지만, 여전히 심쿵 포인트가 있었다.

1. 퓨리오사가 트럭을 다른 쪽으로 틀어서 가자, 워보이가 어디로 가냐고 묻는다. 퓨리오사는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 “우회하는 거야(It’s a detour)”라고 말하는데, 워보이는 다른 의심을 하지 않고 알겠다고 한다. 물론 워보이들의 지능이 낮아서 그런 걸 수 있지만, 퓨리오사가 얼마나 그동안 신뢰를 받았길래 왈가왈부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이나 싶어서 멋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대사를 같이 따라 하곤 한다.

2. 뒤쫓아오는 임모탄들을 막기 위해 고슴도치 부족들에게 기름을 주고, 길을 차단해 달라고 미리 거래 약속을 한 상황. 퓨리오사는 차에서 내리기 전, 차의 부속품에 있는 기름을 손에 묻혀 이마에 바른다. 마치 군인들이 위장 크림을 바르는 느낌이기도 하고, 누구에게도 지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 같기도 하다. 강해보이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이 행동은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3. 임모탄의 아이를 밴, 가장 아끼는 아내였던 스플렌디드. 임모탄이 퓨리오사를 총으로 쏘려고 하는 순간에 문을 열어 임신한 자신의 배를 내미는 장면이 있다. 어떤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를 아끼지 않겠냐마는,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가진 가치를 잘 알고 매우 용감하고도 영리하게 행동해 기억에 오래 남았다. 그런 모습을 보고 아주 간결한 따봉을 날리는 맥스, 이전에 맥스가 총으로 쏜 다리 때문에 제대로 매달리지 못하고 떨어져버린 스플렌디드까지가 완벽한 서사다.

4. 녹색의 땅을 위해 달려왔는데, 알고 보니 이미 폐허가 된 것을 알게 된 퓨리오사. 모래 바람이 날리는 사막에 주저앉아 분노인지, 허탈함인지 알 수 없을 복잡한 감정으로 포효하는 씬은 볼 때마다 감탄하게 된다. 걸어가며 자연스럽게 벗는 의수 또한, 자신이 그동안 바라왔던 것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아무것도 없는 자신이 된 듯해 더 처절하게 느껴진다.

5.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맥스가 소금사막(The salt)을 건너려는 퓨리오사들을 가로막고 시타델로 돌아가자고 설득하는 장면이다. 나는 이 장면이 이 영화를 다른 그저 그런 액션영화들과 다르게 만들어주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살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는 낯선 곳으로 향하기보다,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이 확실히 보장되어 있는 곳으로 가는 선택을 하는 것. 떠나온 곳이지만 오히려 그곳에서의 기회를 잡으려는 선택을 교활하지 않게, 정면돌파하자는 결심을 하는 것. 그로 인해 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도달하기 전까지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도 없는 느낌.

사실 이 자체로도 완벽한 영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프리퀄을 다룬 퓨리오사 영화는 사족이 되지 않을까 싶긴 했다. 액션은 더 나아졌지만 주제의식은 아쉽다는 평들이 있어 조금 기대를 내려놓고 볼 것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이야기를 나누며 책바의 시그니처 칵테일을 마셨다. 마치 우유처럼 하얀 칵테일인데 오늘은 원래 이름 대신 Mother’s milk라고 부르겠단다. 그 이름을 듣고 나니 칵테일 맛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분명 달고 맛있는 맛인데, 왠지 비린 맛이 나는 듯했다. 이게 바로 원효대사 해골물 효과.. 한껏 매드맥스의 기분에 젖어 마무리하기에 좋은 장치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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