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일기

운 좋은 (프로) 이직러

나비사슴 2025. 5. 29. 06:37

저 곧 이직해요. 라고 말하자, 친구가 내게 ‘프로 이직러’라고 말했다. 우리가 알고 지낸 5년 동안, 실제로 두 번 정도는 회사를 옮겼으니 그 말도 무리는 아니었다.

사실 이번엔 이직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출퇴근 왕복 네 시간 걸리는 곳으로 회사가 이사 간다고 해도, 차를 몰고 다니거나 근처에 집을 구하는 옵션이 더 먼저였지, 회사를 옮기는 건 마지막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되리라 생각했다. 기본적으로는 나이 때문에 선택지가 많지 않을 거라 생각했고, 아무리 둘러봐도 지금보다 나은 조건의 회사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정말 감사하게도, 위치나 업무 조건이 놀라울 정도로 좋은 회사를 H님이 제안해 주셨다. 나를 지금의 회사로 이끌어 준 것도 H님이었는데, 내게 귀인이 있다면 H님이 아닐까. 여러 군데 합격한 H님에게 왜 이 회사를 선택했는지 물어보니, 면접 과정에서 채용에 진심이 느껴져서라고 답했다. 그리고 곧 나도 그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면접을 보고 나오는 길, 기분이 좋았다. 사전 질문에 대한 답을 회신받았을 때는 마치 시험 전날 범위가 늘어난 기분이었지만, 답변에서 제품에 대한 확신, 자부심, 애정이 느껴져 오히려 좋았다. 덕분에 이전엔 전혀 알지 못했던 회사와 제품의 존재가 크게 다가왔고, 나는 면접 자리에서 부러움을 숨기지 않았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 회사가 열심히 만들어 낸 제품을 같이 키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면접을 본 지 3시간도 지나지 않아 합격 소식을 들었다. 면접이 분위기가 좋았기에 어느 정도 기대는 했지만, 이렇게 빠르게 연락을 받을 줄은 몰랐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산책을 하면서 기쁜 감정을 꾹 눌러두었는데, 합격 소식을 듣자마자 동네방네 자랑을 했다. 그리고 곧, 아직 입사를 한 게 아니라는 현실을 깨닫고 서둘러 처우 협의에 대한 답신을 정성껏 써서 보냈다. 나도 3시간 이내로 응답했다.

늘 말하지만, 나는 운이 정말 좋은 사람이다. 내 삶의 절반 이상은 이 운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노력이 없진 않았다. 일을 열심히 했고, 좋아하는 것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이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안다. 어떤 이들에게 세상은 참 매정하고, 아프고, 슬픔만 주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내 운을 감사하면서도, 때로는 마음껏 기뻐하는 것이 조심스러워진다.

동생은, 내가 늘 새로운 회사에 큰 기대를 하고 들어갔다가 큰 실망을 하고 나온다며 초를 쳤다. 하지만 나는 입사한 회사가 늘 내가 기대할 만큼 괜찮은 아이템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시장성이 있든 없든, 분명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다만 오래 다닐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을 뿐이다. 결국 내가 그 가치를 더 크게 키워낼 수 있는 힘도,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설득할 능력도 부족했던 거다.

이번 이직이 운에 가깝다 보니 ‘프로‘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지만, 또다시 3년을 채우지 못했으니 ’이직러’ 타이틀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래도 이번에는, 높은 기대를 갖고 입사하는 이 회사에서 오래도록 즐겁게 일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